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와 『덩케르크』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쟁을 다루는 시선과 연출 방식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인물의 내면과 집단의 생존, 두 방향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며 전쟁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관객에게 시공간의 혼란과 몰입을 안겨주는 연출로 유명하다. 그런 놀란이 2차 세계대전을 두 개의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 영화가 바로 『오펜하이머』와 『덩케르크』다. 이 두 작품은 전쟁이라는 공통된 시대 배경을 공유하지만, 접근 방식은 극명하게 다르다. 『오펜하이머』는 한 사람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며 전쟁의 윤리와 과학의 경계를 묻는 영화이고, 『덩케르크』는 거대한 익명의 군중과 그들의 생존 본능을 긴장감 있게 담아낸 영화다. 인물 중심의 서사 vs 상황 중심의 서사, 대사 중심 vs 사운드 중심, 비선형적 시간 구조라는 놀란의 공통된 연출 기법 안에서도 각 영화는 전혀 다른 감각과 메시지를 전달한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든 인물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심리와 죄의식을 중심에 둔다. 이 영화는 단순한 전기영화가 아니다. 과학자로서의 성취와 동시에 파괴의 책임을 떠안은 한 인간이 겪는 도덕적 고뇌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놀란은 3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해체하듯 보여주며, 원자폭탄 개발을 둘러싼 정치적, 윤리적 갈등까지 촘촘히 엮어낸다.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화면 구성, 순차적이지 않은 시간 배치, 핵 실험 장면에서 폭음을 제거한 연출 등은 관객의 시선을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 ‘느낌’과 ‘충격’에 몰입하게 만든다.
반면 『덩케르크』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병사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연합군 40만 명의 탈출을 그린 이 영화는 대사 없이 상황만으로 서사를 밀도 있게 전개한다. 육지, 바다, 하늘이라는 세 가지 시공간이 교차하며 1주, 1일, 1시간의 시간축이 압축적으로 얽혀드는 구조는 놀란 특유의 편집 미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음악감독 한스 짐머의 사운드는 영화 전체를 긴장감으로 감싼다. 특히 시계 초침을 연상케 하는 ‘틱틱’ 효과음은 영화 내내 관객의 심장을 죄어오게 만든다. 인물의 감정선보다 생존 그 자체에 집중하며, 관객에게 “그 전장에 내가 있다면?”이라는 체험을 선사한다.
두 작품 모두 전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전쟁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철저히 개인의 내면과 철학적 갈등을 탐색하며, 『덩케르크』는 집단적 공포와 생존의 본능에 집중한다. 『오펜하이머』는 핵무기를 만들어낸 인류의 양심을, 『덩케르크』는 전쟁의 무명 영웅성과 절박한 현장을 전달한다. 이런 차이는 놀란이 영화에서 다루는 ‘시간’에 대한 철학과도 연관된다. 『오펜하이머』에서 시간은 기억과 고백, 심판을 오가는 정적인 흐름이라면, 『덩케르크』의 시간은 생사를 가르는 순간순간의 누적이다.
영상미 역시 방향이 다르다. 『오펜하이머』는 65mm 필름, IMAX 촬영으로 인물의 클로즈업과 회상 장면을 명확히 구분하고, 강렬한 콘트라스트로 감정을 부각한다. 반면 『덩케르크』는 실제 전투기를 활용한 항공 촬영, 바다 위 로케이션, 최소한의 CG로 현장감을 살리며, 말보다 이미지로 서사를 완성해 간다. 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인물의 철학이냐, 집단의 생존이냐에 따라 갈라지는 지점이다.
결국 이 두 영화는 같은 시대, 같은 감독, 같은 기술적 역량 안에서 전혀 다른 두 개의 전쟁을 보여준다. 『오펜하이머』는 전쟁이 인간 내면에 남긴 흉터를, 『덩케르크』는 전쟁이 현실에서 얼마나 무자비하게 삶을 위협하는지를 보여준다. 놀란은 두 작품을 통해 ‘전쟁’이라는 소재를 철학과 체험, 감정과 생존, 사유와 몰입이라는 양 끝단에서 동시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그 덕분에 관객은 한 감독의 손끝에서 완성된 두 개의 전혀 다른 전쟁을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