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도 현실 같아서, 너무나도 숨 막히게 압축된 한국 사회의 축소판 같아서 그저 가만히 앉아 여운을 삼켜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건 바로 ‘반지하’라는 공간이었다.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 영화의 정체성 그 자체였고, 동시에 한국 사회가 지닌 계급 구조의 은유였다.
서울 어딘가에 있을 법한 낡은 반지하 방. 습하고, 낮고, 창문 밖으로는 오줌 싸는 취객의 다리밖에 보이지 않는 곳.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그 공간이 낯설지 않다. 친구의 자취방이거나,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일 수도 있고, 여전히 누군가의 현재일 수 있다. 영화 속 김가네 가족이 살고 있는 이 반지하 방은 그냥 ‘가난한 집’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 듯하지만 결국은 머물 수밖에 없는’ 중간의 공간이다. 바로 그 애매함이 기생충의 세계관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반지하는 물리적으로 땅속에 묻혀 있지만, 창이 있다. 그 창을 통해 바깥 세상을 본다. 그러나 그 창으로 보이는 건 맑은 하늘이나 공원이 아니라, 골목의 담배꽁초, 하수구 냄새, 물에 젖은 벽이다. 기생충은 이 창을 통해, 세상이 결코 평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조용히 말한다. 햇살이 들어오는 방향은 계급을 상징하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행위는 사회적 이동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함께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은 이 반지하 공간을 아주 정교하게 구성했다. 지상과 지하, 집과 집 사이의 높이 차는 단순한 미장센이 아니라 서사의 흐름을 이끄는 축이다. 박 사장의 집은 언덕 위에 있고, 김가네는 계단을 내려가야만 닿을 수 있는 곳에 산다. 게다가 영화 후반에는 그보다 더 깊은 지하 공간이 등장한다. 아무도 존재를 모른 채 숨어 있던 그 공간은 계급의 끝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 영화가 공개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반지하의 의미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서울 내 반지하 주택 수는 20만 세대를 넘고 있다. 특히 재개발이 늦어진 낙후된 지역일수록 반지하 비율이 높으며, 대부분이 저소득층 혹은 노령 인구다. 영화 속 설정처럼, 창문을 통해 잠깐 들어오는 빛을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도 실제로 존재한다. 영화가 너무 현실 같다고 느껴졌던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 공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폭우가 내리고, 박 사장 가족이 캠핑을 끝내고 돌아오던 밤. 김가네는 빗속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야 했고, 집은 이미 침수되어 온통 물바다였다. 짐을 들고, 물을 퍼내며, 젖은 체온으로 화장실 위에 앉아야 했던 그 순간은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현실적이고 무서웠다. 그건 단순히 ‘재난’이 아니라 ‘현실의 재확인’이었다. 구조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가장 쉽게 위험에 노출된다.
그렇기에 봉준호 감독은 반지하를 선택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 사람이라면 반지하가 어떤 곳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고 말했다. 그 말은 곧, 이 공간이 단순한 세트가 아니라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정서라는 의미였다. 우리는 반지하를 보며 가난을, 계급을, 노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떠올린다. 그리고 동시에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침묵과 체념, 혹은 끈질긴 희망을 본다.
나는 영화관을 나서던 날, 문득 내가 사는 동네의 계단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누군가는 매일 그 계단을 올라야 하고, 누군가는 내려간다. 같은 거리지만 보이는 풍경이 다르고, 느끼는 공기가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단순히 ‘운’이나 ‘노력’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건 구조이고, 현실이다. 기생충은 바로 그 현실을 가장 영화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반지하의 창은 낮고, 좁고, 답답하지만, 그 창 너머로 우리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장면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영화가 단순한 작품을 넘어 ‘경험’이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