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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괴수보다 더 거대한 것 – 가족이라는 이름의 고장난 기계

by 꿀팁 방출 2025. 5. 6.

 

한강에서 괴물이 튀어나왔을 때, 나는 뭔가 다른 영화가 시작됐다는 걸 직감했다. 할리우드식 괴수물의 문법을 따르지만, 그저 파괴의 쾌감을 주려는 영화는 아니었다. 무너지는 것은 도시가 아니라, 가족이었다. 눈에 보이는 괴물보다 무서운 건, 그 괴물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괴물>은 재난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과, 무엇보다 그 중심에 있는 가족의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 영화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을 통해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이상화해 온 ‘가족’을 해체한다. 영화 속 박강두네 가족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과 거리가 멀다. 소통은 서툴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얄팍하다. 큰딸은 입상 경력은 있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둘째 아들은 공부를 많이 했지만 현실 감각이 떨어지며, 아버지는 시대에 뒤처졌고, 강두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무기력한 인물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영화를 진짜 가족 영화로 만든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묶여 있다는 이유 하나로 끝내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그 끈질김, 그것이 이 영화의 감정을 이끈다.

<괴물>은 비극을 통해 가족의 구조를 실험하는 영화다. 딸 현서가 괴물에게 납치되고, 정부는 이를 무시하거나 왜곡하고, 언론은 헛된 공포를 증폭시킨다. 하지만 봉준호는 정치적 풍자나 체제 비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질문한다. “무기력한 가족은 끝까지 가족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영화는 비극적이면서도 단호한 대답을 던진다. 박강두 가족은 서로를 원망하고 오해하고 실망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끌림이 있다. 끝내는 한 명씩 사라져 가는 와중에도, 가족은 형태를 바꾸며 살아남는다.

재미있는 건, 이 영화에서 ‘영웅’이라는 개념이 철저히 해체된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구하는 과정이 정당화되지 않고, 실패가 반복된다. 실제로 박강두는 여러 번 실수를 저지르고, 결국 현서를 구하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 실패를 ‘비극’으로만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실수를 통해 그는 처음으로 진짜 ‘아버지’가 된다. 책임을 배우고, 슬픔을 끌어안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인간으로 변화한다.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모든 함축이 담긴 선언이다. 강두는 현서 대신 구한 소년을 품에 안고 있다. 혈연은 없지만, 이제 그는 다시 가족을 만든다. 영화는 여기서 조용히 묻는다. "가족이란 피인가, 선택인가?" 봉준호는 그 어떤 대답도 내리지 않지만, 그 질문을 던지는 방식 자체가 이 영화의 용기다.

<괴물>은 괴물이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그 괴물은 가족이라는 낡고 삐걱거리는 기계를 작동시킨다. 평소엔 작동하지 않던 감정의 부품들이 위기 속에서 돌아가기 시작하고, 결국 그 안에 무엇이 남는지를 보여준다. 단단한 유대도, 뜨거운 희생도 아니다. 그저 남겨진 자가 살아가는 방식, 끝끝내 서로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흔히 가족을 위로의 공간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괴물>은 말한다. 가족은 반드시 따뜻하지 않다. 오히려 가장 불편하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눈물 나는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지워버리지 못한다. 어쩌면 그게 인간이 가진 가장 깊은 정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괴물>은 단순한 장르 영화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극한을 시험하는 심리 드라마다. 괴물보다 무서운 건, 우리가 외면하고 살아온 ‘가족의 민낯’이다. 그리고 그 민낯을 정면으로 들여다본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남긴 가족 영화로 기억될 자격이 있다.